17. 몰려드는 먹구름 (1)

이십대 초반의 청년이 손이 뒤로 묶여 의자에 결박된 시신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이라기보다는 피로 절인 고깃덩이에 가까운 참혹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청년은 호기심어린 눈으로 시신을 쳐다보다가 시신 옆에 놓아둔 끔찍한 고문기구 중 하나를 집어 시신의 몸통을 푹 쑤셨다.

죽은 자는 움직임이 없다.

청년은 뒤를 돌아보며 순진한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이 녀석 왜 죽은 거야?”

청년의 물음이 어둠 속에 울린 직후 그림자 속에서 두 개의 인영이 나타났다.

둘 다 검은 로브를 입고 고양이 형상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 녀석의 심장에 맹약이 걸려 있었단다.”

여자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 울려 퍼졌다.

청년이 묻자 그 여성은 의자에 묶인 시신에 다가가더니 사내의 오른팔에 부착된 의수를 떼어내고는 그 끝으로 뻥 뚫린 사내의 심장 부분을 가리켰다.

“중립신의 이름을 걸고 한 맹약은 깨지는 순간 목숨을 앗아가지. 아마도 이 녀석은 네가 원하는 이름을 실토하는 순간 맹약을 어겼을 거란다. 그래서 심장이 터져버린 것이지.”

여성의 설명을 들은 청년은 김빠진 표정으로 손에 들고 있던 작은 나이프를 떨어뜨렸다.

“아, 재수 없어. 첫 심문이었는데! 저런 놈을 만나다니.”

청년의 뒤에서 한 사내가 나타났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검은 로브를 입고 고양이 가면을 쓴 키가 큰 청년이었다.

그는 풀 죽은 청년의 뒤통수를 가볍게 후려치고는 짓궂게 말했다.

“가문의 수치! 넌 하는 거마다 왜 그러냐? 고문 하나 제대로 못하고. 나 같았으면 1분 안에 저 새끼 입에서 우리가 원하는 이름을 토하게 만들었을 거야.”

“오빠. 너무 그러지 마. 우리 픽트는 이제 첫 시작인데.”

청년의 뒤에선 검은 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안개는 곧 육감적인 몸매를 지닌 젊은 여성의 형상으로 변했다.

검은 머리칼과 핏빛 눈동자

그녀는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고양이 가면을 썼다.

처음 나타났던 사내가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네 명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절도 있는 자세로 왼손을 뻗어 손등을 보였다.

손등 위엔 두개골을 꿰뚫는 번개 형상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평범하고 어떻게 보면 조잡한 형태의 문신이었지만 그 표식이 의미하는 바를 아는 자라면 절대로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표식은 암살교단을 좌지우지 하는 4대 가문 중 하나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암살교단의 4대 가문 중 가장 강하지 않지만 가장 악랄하다는 평가를 듣는 존재들.

그들은 가족 단위로 움직인다.

“이번에 우리가 상대할 자는 세계의 적이다. 힘 수치 600을 돌파했다는 괴물 중의 괴물이지. 자칫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경계를 늦추지 마라. 그리고 항상 조심하라. 나는 아비 된 입장으로 단 한 명의 가족도 잃고 싶지 않으니까.”

현 알메리아 가문의 당주 드비시 알메이라는 짧은 훈시를 마치고 그의 아내와 함께 어둠 저편으로 사라졌다.

장남과 장녀인 카즈 알메이라와 마이라 알메이라도 묵묵히 부친의 뒤를 따랐다.

마지막에 남은 건 막내인 픽트 알메이라였다.

그 청년은 아까 당한 놀림의 분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찌푸린 얼굴로 남아 있다가 이내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의수를 집어 들더니 죽은 사내의 턱을 벌리고 그대로 의수를 쑤셔 박아 버렸다.

의자에 묶인 시신이 거칠게 요동쳤다.

“씨발…! 이 새끼 때문에!”

처참하게 망가진 시체를 놔두고 청년은 자리를 떠났다.

피 냄새만이 가득한 방 안에 한 사내가 찾아온 것은 그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지난 뒤였다.

Kim Sungchul 참혹하게 망가진 시체를 가만히 응시했다.

끔찍한 고문으로 인해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지만 그의 입에 박힌 의수가 그의 신분을 알려주고 있었다.

“으… 뭐야.. 이건… 못 보겠어.”

베르텔기아는 주머니 안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Kim Sungchul 주변을 살폈다.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끔찍한 고문 기구와 핏자국 외에는.

평범한 자들의 솜씨는 아니다.

Kim Sungchul 그런 느낌을 받았다.

Kim Sungchul 잠시 크리스티안의 시체 옆에 서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는 피로 절여진 고문 기구 옆에 반짝이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금화.

‘설마 이걸 단서로 찾아서..?’

상인들의 세계는 잘 알지 못하지만 언젠가 들은 이야기가 하나 있었다.

유능한 상인은 동전 하나만으로 거기 얽힌 모든 사정을 알 수 있다는 조금은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그때는 일소에 부쳤지만 지금 현재 남겨진 단서는 그것뿐이다.

‘날 노리는 자들의 소행인가?’

그것 외에는 달리 해석할 방법이 없다.

노예사냥꾼 같은 하찮은 인간 하나 잡으러 이런 수단까지 쓸 할 일 없는 녀석은 찾아보기 어려우니.

그리고 Kim Sungchul 아직 우월한 지위에 있다.

왜냐하면 미지의 적들은 크리스티안으로부터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을 것이기에.

맹약의 효과는 그러한 것이다.

Kim Sungchul 입안에 의수를 뽑아 크리스티안의 잘린 팔에 동여 맨 후, 그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나쁘지 않은 친구였다.

듣고 싶은 이야기도 있었다.

어째서 노예사냥꾼이 됐는지.

학교에선 어떤 삶을 보냈는지.

그러나 이야기 할 시간이 없었고 이제는 그는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시체 냄새를 맡고 파리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Kim Sungchul 시신에 기름을 뿌리고 불을 붙였다.

활활 타오르는 방을 뒤로 한 채 Kim Sungchul 화려한 불빛으로 번쩍이는 노예 거리로 섞여 들었다.

불이 났다는 고함이 뒤에서 들려왔다.

그의 입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무심한 달빛마저 갈라버릴 정도의 서늘한 살기를 담고 있었다.

회오의 관에 돌아왔을 때 Kim Sungchul 현관에 나와 있는 사라사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사라사의 표정이 이상하다.

평소엔 도도한 표정으로 시종일관 매몰차게 대하던 그녀였지만 오늘은 어째서인지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아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Kim Sungchul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사라사의 등 뒤에서 낯익은 울음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아.. 바깥에 나와 돌아 다니길래.”

사라사는 김성철의 시선을 피하며 하늘다람쥐를 놓아주었다.

사라사의 차가운 손아귀에 잡혀 있던 하늘다람쥐는 풀려나자마자 부리나케 뛰어와 김성철의 어깨 위로 올라갔다.

사람의 손길을 좋아하는 하늘다람쥐였지만 차가운 사라사의 손길은 좋아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라사는 그런 하늘다람쥐를 원망스런 눈으로 보더니 매몰차게 말했다.

“우리 기숙사에 애완동물 사육은 금지야.”

“…잠깐만 돌봐주겠다.”

Kim Sungchul 그렇게 말하고는 사라사를 지나쳐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사라사는 그의 등 뒤를 노려보다가 종종걸음으로 쫓아왔다.

“금지라고 말했잖아. 이 기숙사의 주인은 나야.”

“이 다람쥐의 주인이 죽어서 어쩔 수가 없다. 하루만 맡지.”

기세등등한 사라사였지만 주인이 죽었다는 말에 한 발 물러섰다.

Kim Sungchul 고개를 끄덕였다.

사라사를 뒤로 하고 Kim Sungchul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너저분한 실내가 그를 반겼다.

Kim Sungchul 하늘 다람쥐를 침대 위에 올려놓고는 잠시 자리에 앉아 현 상황을 정리했다.

‘만약 암살자가 나를 노리는 거라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우연의 일치일수도 있겠지만 적은 황금 도시까지 손길을 뻗쳤다.

무엇보다 걸리는 것은 무인 금화의 존재.

Kim Sungchul 회오의 관에 오기 전에 학교 앞의 도구상을 한 번 들렸었다.

도구점의 주인은 가게 바깥에서 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안에선 사람의 기척이 없었고 누군가 침입한 흔적도 없었다.

게다가 한 밤 중이라 어디 물어볼 곳도 마땅치 않았다.

자초지종을 알기 위해서는 내일의 해가 뜬 다음에야 뭐라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크리스티안이 죽은 이상, 정보를 얻을만할 곳이 마땅치 않군.’

한편 사라사는 아까부터 김성철 문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뭐라도 할 말이라도 있는 것일까.

Kim Sungchul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젖혔다.

Kim Sungchul 무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라사는 김성철의 시선을 피하며 우물쭈물하더니 이내 눈빛을 달리하고 김성철을 똑바로 응시했다.

“아까 일 말인데. 딱히 악의는 없었어. 어른답지 않게 화를 낸 거 같아서.”

“사과 할 일은 아니다.”

Kim Sungchul 문을 닫았다.

그런데 문을 닫으려고 하자 사라사의 창백한 손이 닫히는 문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Kim Sungchul 다시 문을 열었다.

김성철의 싸늘한 눈빛이 사라사의 얼굴에 꽂혔다.

“그런 눈으로 볼 거 없잖아. 내 말은 음… 여기 온지도 오래 된 거 같은데. 그러니까 같은 기숙사를 쓰는 사람으로서 가끔은 대화를 해야 된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녀는 김성철 너머 침대 위에 웅크리고 있는 하늘다람쥐를 눈에 담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다람쥐가 어지간히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본 Kim Sungchul 문득 가슴에 사무친 어떤 광경을 떠올렸다.

‘그 녀석도 유난히 동물을 좋아했었지.’

잠깐 찾아온 상념은 뒤이은 사라사의 목소리에 의해 깨어졌다.

“그나저나, 당신. 회오의 관의 퀘스트를 찾아다니는 거 같던데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 봐도 좋아. 오늘은 내가 실수한 것도 있으니 특별히 알려줄 테니까.”

“뭘 가르쳐 줄 수 있지?”

“열리지 않는 문의 악마 공략법.”

사라사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이에 대한 김성철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

“야바위 하던 악마 말인가? 그 녀석은 이미 공략했어.”

“그래? 그럼 지하우물의 해골병사 퀘스트는?”

“그것도 이미 공략했다.”

이후에도 사라사는 몇 개의 퀘스트를 더 열거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이럴 수가… 거짓말이지?”

그녀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김성철을 응시했다.

그런 사라사를 보던 Kim Sungchul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고 말했다.

“학교 바깥 마법도구점에 대해 아나?”

“아. 카벙클? 응. 당연히 알지.”

“주인에 대해서도?”

사라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살집 좋고 목소리 큰 아저씨 말이지? 응 알아. 저학년 때부터 알고 지냈는걸.”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그쪽 주인이 어디 사는지 알고 있나?”

“알긴 아는데 그건 왜 물어?”

“그 사람한테 전해 줄 물건이 있어서 말이야. 위치를 안다면 내게 알려줬으면 하는군.”

그렇게 말하며 Kim Sungchul 휘파람으로 하늘 다람쥐를 불렀다.

사라사의 눈동자가 하늘 다람쥐에게 고정됐다.

하늘 다람쥐는 사라사의 관심이 무서운지 몸을 떨었지만 이내 자신을 움켜쥔 김성철의 손에 의해 사라사에게 운반됐다.

“이 녀석을 잠시 맡아줘. 지금 당장 그쪽으로 전해줘야 할 물건이 있다.”

그녀는 두 손을 모아 하늘 다람쥐를 받았다.

하늘 다람쥐는 경악을 했지만 김성철이 땅콩을 내밀자 곧 진정됐다.

Kim Sungchul 사라사에게 땅콩이 담긴 작은 종이봉지를 내밀며 대답했다.

“동물과 친해지려면 먹을 것을 주는 게 가장 빠르지.”

사라사가 마법도구점 주인에 관한 정보를 내놓은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 길로 Kim Sungchul 어둠을 해치고 도구상점 주인이 산다는 다세대 건물로 향했다.

실내는 온통 짙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Kim Sungchul 기척을 죽인 채 진실의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만일의 위협에 대비하며 천천히 집안으로 접근했다.

아직 여기까지 살인자들의 손길은 뻗치지 않았다.

주인은 이미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Kim Sungchul 주인을 흔들어 깨웠다.

잠꼬대를 하던 주인은 눈을 비비고 일어났고 그리고 야밤의 불청객과 마주했다.

“무.. 무슨 일이오?”

Kim Sungchul 소스라치게 놀라는 주인에게 피 묻은 금화를 내밀었다.

“이걸 기억하는가?”

그제야 주인은 불청객의 정체가 대박을 안겨다 준 사내라를 것을 인식했다.

머릿속에 별별 생각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 어떤 상상도 사내의 입에서 나온 것만큼 충격적이진 않았다.

“나는 부수는 자 김성철이다. 세간에선 날 세상의 적이라 부르더군.”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Kim Sungchul 드워프들이 그들의 신에게서 하사받았다는 전설을 지닌 팔 가라즈를 꺼내 보였다.

찬란한 광휘에 휩싸인 신물을 본 주인은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끄… 끄어어어….”

Kim Sungchul 그를 노려다보며 작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당장 짐을 싸서 황금 도시를 떠나라. 그리고 인간제국의 제도로 가 황제에게 알현을 청해라.”

“으… 으어어….”

말을 잇지 못하는 주인에게 Kim Sungchul 영혼 창고에서 상아자루로 만든 단검 하나를 꺼냈다.

“이걸 보여주면 황제는 널 만나줄 것이다. 하지만 명심해라. 만약 이 사실을 다른 누구에게 발설한다면…..”

김성철의 손이 주인 너머 침대의 장식장을 움켜잡았다.

구리로 만든 장식은 김성철의 손아귀 속에서 으스러졌고 이윽고 그의 손가락 틈 사이에서 엿가락처럼 삐져 나왔다.

“혹 내게서 숨을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한다면 저질러도 좋다. 운명을 시험해보고 싶다면 말이다.”

Kim Sungchul 피 묻은 금화를 사내 앞을 내려놓은 채 뒤돌아섰다.

“지금 당장 떠나라.”

“아.. 알겠습니다!”

사내는 침대에서 굴러 떨어지듯 내려와 허겁지겁 옷을 집어 입었고 짐을 챙겼다.

잠시 후, 마차 한 대가 빠르게 차가운 밤공기를 해치고 먼 곳으로 사라졌다.

Kim Sungchul 마차가 사라지는 걸 보고서야 돌아섰다.

품속의 베르텔기아가 말했다.

김성철이 묻자 베르텔기아는 주머니 속에서 빠져나오더니 그의 어깨 위에 하늘 다람쥐처럼 내려앉았다.

“죽일 줄 알았거든. 당신이라면.”

“나는 죄 없는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

“그게 의외라는 거야. 난 당신이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으로 봤거든. 마치 칠영웅처럼.”

“…난 그들과 다르다.”

Kim Sungchul 마치 자신에게 다짐하듯 말하고는 하늘을 봤다.

동녘엔 어느새 미명이 비치고 있었다.

‘시간을 조금 벌긴 했지만 남은 시간은 별로 없다. 계획을 수정해서 빠르게 천공학파의 비전을 손에 넣은 후 이곳을 떠나야 한다.’

그의 시선은 산정 높이 자리 잡은 둥근 돔을 얹은 건물을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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